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행군 및 군량보급의 난관 ==== ||[youtube(iqlPVZ7uE_Y)]|| >[[한양]]에서 출정할 때 조정에서는 병사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렸다. 날은 춥고 길은 먼데 면포로 한기를 막고 흰쌀로 주린 배를 채워 줄 생각을 못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힘없고 가난한 나라였기에 줄 수 있는게 없었다. 주지는 못해도 하나있는 목숨만은 뺏지 말아야 한다....(중략)....출정 전에 장졸들을 부풀리는 건 군문에서는 늘상 있는 일. 허나 그 숫자는 5배 이상 차이가 났다. 병사들의 예기(銳氣)만 살아 있어도 이리 걱정하진 않았을 거다. 이럴 때일수록 병력을 모아야 하는데 4개의 길로 10만이 아니, 10만도 안되는 병력이 움직인다. 불안하다. >---- > 진주박물관에서 만든 단편영화 <사르후>에 나온 김응하의 나레이션 조선군은 [[1619년]] 1월에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편제상 명나라 총병 유정이 거느리는 동로군 휘하에 편입되었다. 일단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으나, 이때는 한겨울이었고, 음력 3월(양력으로는 4월)이 되었어도 아직 가시지 않은 영하의 추위 때문에 조선군의 행군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사르후와 거의 동일 위도에 있는 [[선양시]]의 3월 평균 기온이 영상 1도이다.] 이렇게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군의 어려움을 더 가중시킨 것은 군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행군 내내 계속 굶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군량은 전진하는 병사의 후위에 따라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만주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계속 끊겼으며, 게다가 후금의 기병이 치고 빠지는 덕에 그런 수송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619년 3월 1일, 군량 조달의 총 책임자였던 평안도 관찰사 박엽(朴燁, 1570 ~ 1623)과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 윤수겸(尹守謙, 1573 ~ 1624)의 태업 때문에 처음으로 보급이 도착했다.[* 원정군 사령관인 도원수와 직급이 비슷했기 때문에 지시가 먹혀들지 않아 도원수를 무시한 것이다.] 그 전에는 그냥 굶거나 명군에게 식량을 빌렸을 정도로 보급 상태가 막장이었다. 심지어 도착한 군량도 매우 모자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